[칼럼] 법을 신으로 섬기는 사회는 어디로 가는가
민주주의와 법치, 균형의 필요성을 되짚다
사회적 논란이 큰 사건이 헌법재판소로 넘어가는 순간, 우리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시험대에 오른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찬성과 반대 양측에서 벌어진 ‘삼보일배’는 그 시험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본래 종교적 의례였던 삼보일배가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퍼포먼스로 전환되는 모습은, 단순히 독특한 사회 현상으로만 치부하기엔 복잡하고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 법과 헌법재판소는 단지 공적 체계의 일부를 넘어선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법은 원래 인간의 필요와 공익, 정의 실현을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법이 마치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힘을 가진 것처럼 여겨질 때, 즉 신격화될 때 법은 인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잃어버리고 인간을 지배하는 도구로 변질된다. 삼보일배의 헌법재판소를 향한 행위는 바로 그러한 신격화의 결과를 드러낸다. 주권자인 시민이 헌법재판소 판결이라는 ‘은총’을 바라며 기도하는 모습은 민주주의 체제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 아니다.
헌법재판관은 대제사장이 아니다. 그들은 특정 이념이나 가치를 관철하기 위해 임명된 것이 아니라 공정하게 헌법의 해석을 담당하는 법률 전문가일 뿐이다. 그러나 법과 헌재가 신격화되면, 그곳에 자리한 이들 역시 신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진 존재로 인식된다. 법조 엘리트들에게 이러한 인식은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친다. 자신의 권력이 스스로 정당화되고, 더 이상 국민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질 위험이 생긴다. 결국, 법조 엘리트들이 사회적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무책임하게 회피하거나, 반대로 자기 권력을 과도하게 행사하는 극단적 태도에 빠질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법이 지도하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시민의 역할이 무력화되는 일이다.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와 한 몸이어야 한다. 법은 주권자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시민의 의지에 따라 수정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법이 신격화되면서 민주주의는 뒤로 밀려난다. 민주적 절차와 시민 참여 대신, ‘법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으로 모든 사회적 논쟁은 종결된다. 주권자인 시민은 더 이상 정치적 주체로 행동하지 않고, 헌법재판관의 ‘결단’을 지켜보는 수동적 관객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사회의 문제는 대화를 통해 해결되지 않고 오직 법적 판결로만 결정되는 풍경이 일상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표면적 껍데기만 남은 채 실질적 기능을 잃게 된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상황에 따라 수정과 보완이 필요하다. 법치주의는 법이 최상위 권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치 아래에서 시민은 법을 활용해 정의를 실현할 능력과 권리를 갖는다. 법을 신격화하는 순간 우리는 법을 지배하는 대신, 법의 종이 된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잃는 것이며, 사회적 갈등과 문제 해결의 능력을 포기하는 일이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판결 지연에 많은 이들이 실망하거나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와 법치의 관계를 다시금 고민해야 할 출발점이다. 법치주의가 민주주의에 봉사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 위에 군림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 법과 헌재를 둘러싼 숭배적 태도를 거두고,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법을 신으로 섬기는 사회는 결국 어디로 갈까?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나침반을 잃은 항로와 같다. 우리는 법을 존중하지만, 동시에 법이 항상 정의롭거나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법은 우리의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다. 헌재의 판결과 법률 시스템이 민주적 맥락을 잃지 않고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할 때, 진정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조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법 앞에 삼보일배를 할 것이 아니라, 법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고민을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