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90일의 유예기간, 우리에게 주어진 전략적 기회
미국의 관세 완화 조치, 그 이면의 계산과 한국의 대응 방향
미국이 한국에 부과하려던 25% 상호관세를 90일간 유예하고 기본 10%만 적용하기로 한 결정은 숨 막히던 한미 통상 갈등에 잠시 숨통을 틔워주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이 90일의 시간은 안도할 여유가 아닌, 더 치밀한 전략을 수립해야 할 긴박한 기회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번 결정을 단순히 한국에 대한 배려로 해석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미국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는 미국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전략적 후퇴로 볼 수 있다. 트럼프의 급격한 관세 부과 정책이 월가에 던진 충격파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2008년 금융위기 수준의 주가 하락은 트럼프 행정부에 분명한 경고 신호였다.
미국 내 산업계와 소비자 단체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산 제품에 대한 고율 관세는 결국 미국 소비자들의 부담으로 돌아가고, 글로벌 공급망이 복잡하게 얽힌 현대 산업 구조에서 미국 기업들 역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반도체와 자동차 부품 등 핵심 산업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과 긴밀히 협력하는 미국 기업들의 목소리가 워싱턴에 전달됐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맥락에서 90일 유예 조치는 트럼프 행정부의 '계산된 후퇴'로 볼 수 있다. 강경한 보호무역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그 충격을 완화하고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적 선택인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 90일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무엇보다 한덕수 권한대행 체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국가적 역량을 총결집해야 한다. 권한대행 체제는 태생적으로 결정권에 제약이 있고,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 단독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국회, 산업계, 전문가 집단과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특히 국회와의 소통은 필수적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익을 위한 초당적 협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국회 내 통상 전문가들과 정기적인 협의체를 구성하고, 미국과의 협상 전략을 함께 수립해 나가야 한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부담을 분산시키는 차원을 넘어, 다양한 시각과 전문성을 결집시켜 더 나은 해법을 찾기 위한 실용적 접근이다.
동시에 미국 내 우리의 우군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한국 기업과 거래하는 미국 기업들,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안보 전문가들, 한국에 우호적인 의회 인사들을 통해 미국 내 여론을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미 동맹의 경제적 가치를 부각시키고, 고율 관세가 결국 미국 경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전달해야 한다.
산업별 맞춤형 대응도 중요하다. 모든 산업을 동일하게 대응하기보다는, 미국이 특히 관심을 갖는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등 핵심 산업별로 차별화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일부 산업에서는 미국 내 투자를 확대하는 방안을, 다른 산업에서는 기술 협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이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활용하는 전략이다.
한편으로는 미국 일변도의 무역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중장기적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유럽, 동남아, 중남미 등 다양한 시장으로 수출선을 다변화하고, 국내 산업 구조도 보다 탄력적으로 재편할 필요가 있다. 이번 사태는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경제적 의존이 얼마나 큰 리스크를 내포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90일의 유예 기간은 결코 길지 않다. 그러나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한국 경제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관세 부담을 최소화하고, 중장기적으로는 보다 탄력적이고 다변화된 경제 구조를 구축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덕수 권한대행 체제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소극적 대응의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런 상황일수록 국가적 역량을 총결집하고,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90일 후에 다시 25% 관세의 망치가 떨어지느냐, 아니면 더 나은 합의점을 찾아내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준비와 대응에 달려 있다.
미국의 관세 유예 조치는 시간을 벌어준 것일 뿐,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이 90일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진정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국익을 최우선으로 두고, 정파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