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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교학점제, 교실의 혼란만 가중

양상현 기자 2025. 4. 13. 22:36

취지는 좋았으나 현실은 혼란... 학교 현장의 목소리를 듣다


교육부 누리집에 들어가면 화려한 그래픽과 함께 '미래를 여는 고교학점제'라는 문구가 방문자를 맞이한다. 아이들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새 시대의 교육 패러다임이라는 설명도 붙어있다. 그러나 실제 학교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이 화려한 수사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지난주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 교무실. 점심시간임에도 식사를 건너뛰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교사들이 눈에 띄었다. 1학년 담당 교사들은 한 학기 만에 생활기록부를 작성해야 하는 부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전에는 학년 말에 한 번 작성하던 것을 이제는 학기마다 해야 하니, 업무량이 두 배로 늘어난 셈이다.

"고1과 고2를 같이 가르치는데, 수업 준비가 완전히 다릅니다. 교육과정도 다르고, 평가 방식도 다르고... 매일 두 개의 학교를 오가는 기분이에요." 10년 차 수학 교사의 말에는 피로감이 묻어났다.

고교학점제는 올해부터 전국 모든 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전면 시행되었다.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맞게 과목을 선택하고, 이수 기준을 충족하면 학점을 취득하는 방식이다. 대학처럼 학년 개념보다는 학점 이수가 중요해진다. 취지는 분명 좋다. 획일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것이니까.

그러나 현장은 혼란스럽다. 가장 큰 문제는 '최소 성취 수준 보장제'(최성보)다. 교과별 학업 성취도가 40% 미만인 학생은 학점을 취득하지 못하고, 별도의 보충 학습을 받아야 한다. 이론상으로는 합리적이지만, 실제 운영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3월 모의평가에서 한국사 20점 미만이 수십 명이었다"며 "이 아이들이 모두 최성보 대상인데, 학교에서 이들을 위한 보충 수업을 제대로 운영할 여력이 없다"고 토로했다. 결국 학교들은 시험 문제를 쉽게 내거나, 수행평가 비중을 높이는 방식으로 '미도달' 학생 수를 줄이려 애쓰고 있다.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교육청은 '점수 퍼주기'가 의심되면 감사를 하겠다고 경고한다. 학교는 진퇴양난에 빠진다. 시험을 어렵게 내면 미도달 학생이 많아지고, 쉽게 내면 감사 대상이 된다. 한 교사는 이를 두고 "동그란 네모를 그리라는 요구"라고 비유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고교학점제와 현행 대입 제도의 불일치다. 학생들은 자유롭게 과목을 선택하라고 하지만, 대학은 여전히 수능 성적과 내신 등급을 중심으로 학생을 선발한다. 고1 학생들이 스스로를 '마루타'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들은 결승선은 보이는데 달릴 트랙이 그려져 있지 않은 경기장에 선 선수와 같은 처지다.

서울의 한 고3 학생은 "1학년 동생들이 정말 불쌍하다"며 "우리는 적어도 어떤 과목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알았는데,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사교육 시장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고교학점제 대비 전문' 학원들이 생겨나고, 학부모들은 불안한 마음에 지갑을 열고 있다. 교육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는 셈이다.

고교학점제의 또 다른 맹점은 학교 간 격차다. 대도시 대형 학교는 다양한 선택과목을 개설할 수 있지만, 농어촌 소규모 학교는 교사 수가 제한되어 선택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온라인 공동교육과정으로 보완한다지만, 실시간 쌍방향 수업의 질은 대면 수업과 비교하기 어렵다.

교육 정책은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점진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고교학점제는 마치 완성된 청사진이 있는 것처럼 전격 시행되었다. 현장의 혼란과 부작용은 고스란히 교사와 학생들의 몫이 되었다.

한 교장은 "교육 정책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요동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고교학점제도 다음 정부에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현장을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교육은 국가의 미래다. 그런데 지금 학교 현장에서는 조용한 내란이 일어나고 있다. 교사들은 업무 과중에 시달리고, 학생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고교학점제가 정말 학생들을 위한 제도인지, 아니면 또 하나의 실험에 불과한지 진지하게 재고해볼 시점이다.

정치적 혼란이 교육 현장의 위기를 가리고 있지만, 학교의 위기는 곧 국가의 위기다. 고교학점제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실질적인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 미래 세대를 위한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