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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는 소리

양상현 기자 2025. 4. 15. 00:39

노모(老母)를 돌보는 장남의 쓸쓸한 독백

가족이란 무엇일까. 피를 나눈 사람들의 단순한 집합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일까. 요즘 들어 이 질문이 자주 머릿속을 맴돈다. 특히 어머니의 숨소리가 점점 가늘어질 때마다.

우리 가족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다. 형제자매들은 각자의 삶을 살고,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모인다. 그러나 일상의 무게는 불균등하게 나뉘어 있다. 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온전히 장남인 내 몫이 되었다. 다른 형제들은 '형편이 안 된다'는 말로 자신들의 부재를 정당화한다.

형편이 안 된다. 참 아이러니한 말이다. 나보다 훨씬 넉넉한 살림에, 더 좋은 집과 차를 가진 그들이 말하는 '형편'이란 무엇일까. 시간의 형편? 마음의 형편? 어머니는 그런 그들을 이해하려 한다. "저들도 형편이 안 돼 그러니 어쩌겠노." 치매 초기 증상처럼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말에 가슴이 아프다.

어머니는 이제 서서히 이승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꽃이 필 때도 소리가 없지만, 지는 것도 소리 없이 진행된다. 다만 그 과정은 누군가의 지켜봄이 필요하다. 꽃이 지는 소리를 듣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형제들은 가끔 들른다. 손님처럼. 깨끗한 옷을 입고, 선물을 들고, 몇 시간 머물다 떠난다. 그들의 방문은 어머니에게 자랑거리가 된다. "우리 아들, 우리 딸이 왔다 갔다." 그러나 그 짧은 방문이 끝나면 다시 긴 침묵과 외로움이 찾아온다. 어머니의 밤은 더 길어지고, 숨소리는 더 거칠어진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만약 그들이 단 하루라도 어머니와 함께 밤을 보낸다면 어떨까. 어머니의 헐떡이는 숨소리, 한밤중에 들리는 신음, 그리고 때때로 찾아오는 혼란스러운 대화를 경험한다면. 그들도 느낄까, 이 무거운 책임감과 슬픔을?

가족의 의무는 균등하게 나누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누군가는 더 많은 짐을 지고, 누군가는 그저 지나가는 손님이 된다. 이것이 가족의 모습일까?

어머니를 돌보는 일은 단순한 육체적 돌봄을 넘어선다. 그것은 어머니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고, 그녀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는 일이다. 손님처럼 다녀가는 방문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깊은 연결이 필요하다.

나는 때때로 분노한다. 그들의 무관심에, 편의적인 방문에, 그리고 '형편'이라는 말로 포장된 회피에. 그러나 분노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것은 곧 체념으로, 그리고 쓸쓸한 수용으로 바뀐다. 어쩌면 이것이 가족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여전히 그들을 기다린다. 창가에 앉아 길을 바라보며, 전화가 올 때마다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의 사랑은 조건 없고 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어떨까? 편리할 때만 나타나는 간헐적인 관심이 사랑일까?

가족이란 무엇일까. 피를 나눈 사람들의 단순한 집합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일까. 나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알게 된 것은, 진정한 가족은 함께 꽃이 지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숨소리가 오늘도 밤의 정적을 깬다. 나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어머니의 삶이 들려주는 마지막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나라는 사실을, 나는 이제 조용히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