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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이 건네는 공동체의 온기

양상현 기자 2025. 4. 17. 00:19

미국 첼시 마을의 인간 띠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며칠 전, 미국 미시간주의 작은 마을 첼시에서 일어난 이야기 하나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웠다. 인구 5,300명의 이 소도시에서 동네 서점이 한 블록 떨어진 곳으로 이사할 일이 생겼다. 9,100여 권의 책을 옮겨야 했지만, 서점 주인에게는 파트타임 알바 몇 명뿐. 이삿짐센터를 부르자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고작 300미터 거리라 전문 업체를 쓰기도 애매했다.

그때 서점 주인의 머릿속을 스친 아이디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책을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인간 띠를 만들면 어떨까? 홈페이지에 자원봉사자 모집 공지를 올렸고, 이삿날이 되자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300여 명의 주민이 모여들었다. 6살 꼬마아이부터 91세 할머니까지, 심지어 휠체어를 탄 주민까지 합류해 두 줄의 인간 띠를 만들었다. 그렇게 9천 권이 넘는 책이 2시간 만에 새 보금자리로 옮겨졌다.

이 이야기를 접하며 나는 문득 우리 동네를 떠올렸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이웃과 어색한 목례만 나누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서로 단절된 채 살게 되었을까?

첼시 마을의 인간 띠는 단순히 책을 옮기는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책을 전달하며 자연스레 오간 대화들 - "이 책 읽어보셨어요?", "그건 안 읽어봤어요. 혹시 이 책 읽어보신 분 있나요?", "그 책도 좋지만 이 책도 같이 읽어보세요." - 은 단절된 관계를 이어주는 실타래가 되었다.

우리는 종종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을 걱정한다. 통계청은 2070년 한국 인구가 3,800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첼시의 사례는 인구 규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일깨운다. 그것은 바로 '관계의 밀도'다.

인구 5,300명의 첼시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작은 면 단위 정도의 규모다. 그러나 이 작은 마을에서는 서점 이전이라는 일상적 사건이 공동체 축제로 탈바꿈했다. 이웃이 이웃을 알고, 서로의 필요에 기꺼이 응답하는 관계의 밀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천만 인구의 서울에서도, 수십만 명이 사는 중소도시에서도 많은 이들이 외로움을 호소한다. 인구 규모는 크지만 관계의 밀도는 희박한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의 46%가 '외롭다'고 느낀다고 한다.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외로움을 더 심하게 느낀다는 점이 안타깝다. 디지털 연결성은 높아졌지만, 실제 대면 관계는 오히려 줄어든 결과다.

첼시의 인간 띠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인구 감소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시급한 것은 남아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더 행복하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일이다. 인구 수치에 집착하기보다 관계의 질을 높이는 데 더 많은 사회적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우리 동네에도 첼시의 서점 같은 공간이 있을까?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대화하고, 필요할 때 서로 도울 수 있는 접점이 될 만한 곳 말이다. 대형 프랜차이즈가 아닌, 지역에 뿌리내린 작은 가게들. 아파트 단지 안의 작은 도서관이나 마을 카페. 혹은 동네 텃밭이나 공원의 벤치 한 자리.

이런 공간들이 제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 '느림'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효율과 속도만을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이웃과 마주칠 시간도, 대화를 나눌 여유도 없다. 첼시 주민들이 서점 이사를 돕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준 것처럼, 우리도 관계를 위한 시간을 아끼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한 작은 시작의 힘을 믿어야 한다. 첼시의 인간 띠도 처음에는 서점 주인의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한 사람이 던진 작은 제안이 300명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우리 동네에서도 누군가 첫 걸음을 내딛는다면,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함께할지 모른다.

인구 감소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공동체의 쇠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적은 인구가 더 깊이 연결된 공동체를 만들 가능성도 있다. 첼시처럼 말이다.

책을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며 웃음꽃을 피웠던 첼시 주민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내일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이웃에게 어색한 목례 대신 따뜻한 인사를 건네볼 생각이다. 그것이 우리 동네의 인간 띠를 만드는 첫 걸음이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