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교실에서 태어난 괴물들
한국 엘리트의 파시즘은 12년간의 입시 전쟁에서 비롯됐다
지난 주말, 서울 광화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계엄령을 옹호하는 집회를 열었다. 놀랍게도 그들 중 상당수는 법조인, 의사, 교수 등 소위 '엘리트'로 불리는 이들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을 나와 사회적 지위를 얻은 이들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계엄을 지지하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서구의 극우 세력이 주로 교육 수준이 낮은 백인 남성들로 구성된 반엘리트주의 성향을 보이는 반면, 한국의 극우는 오히려 고학력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친엘리트주의 성향을 띤다. 이 기묘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교육 시스템의 본질을 들여다봐야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반에서 10등 안에 들지 못하면 담임 선생님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한번은 수학 시험에서 12등을 했다가 "너 이러다 인생 망친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나는 그저 중학생이었다. 그런데 왜 한 번의 시험 성적이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잣대가 되었을까? 이것이 바로 한국 교육의 민낯이다.
김누리 교수가 말한 '연성 파시즘'은 한국 교실에서 매일 재생산된다. 우리는 12년 동안 1등이라는 강자와 동일시하고, 성적이 낮은 학생을 무의식적으로 혐오하며, 'SKY'를 향해 모두가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학생들은 극도로 공격적이 되고, 승자와 패자라는 흑백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내가 아는 한 서울대 법대 출신 변호사는 최근 SNS에 "계엄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필요한 조치"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학창 시절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모의고사에서도 항상 상위권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부정하는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교실에서의 성공 경험을 통해 강자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와 약자에 대한 경멸을 내면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전교 1등이 파시스트가 될 확률이 제일 높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한국 교육 시스템에서 성공한 이들은 자신의 성공이 순전히 개인의 노력과 능력 때문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받은 특권과 기회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진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반발할 것이다. "나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지금도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데 어떻게 나를 파시스트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하지만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민주주의는 다르다. 당신이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자일지 몰라도, 일상에서는 여전히 '사회적 독재'에 순응하고 있을 수 있다.
지난 주말, 계엄 반대 집회에 참석했던 한 지인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이의 학원 스케줄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일상에서는 여전히 입시 경쟁과 서열화에 순응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내재된 무의식적 파시즘의 모습이다.
프랑스는 68혁명 이후 파리대학을 13개로 나누어 평준화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대학 서열화를 철폐하고 경쟁 없는 전인교육을 실현했다. 이들 국가는 정치적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적 민주주의도 이루어냈다.
반면 한국은 어떤가? 우리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을 만큼 정치적으로는 성숙했지만, 여전히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대학 서열화와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연간 32조원에 달하는 사교육비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시작되는 경쟁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사회적 독재'에 깊이 빠져 있는지 보여준다.
'서울대 10개 만들기'와 같은 정책은 단순한 교육 정책이 아니라 사회적 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한 시도다. 하지만 이런 정책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내면의 파시스트와 마주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로 나설 수 있지만, 과연 우리 아이를 입시 경쟁에서 빼낼 용기가 있을까?
괴물이 된 엘리트들을 비난하기 전에, 그 괴물을 키운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한다. 교실에서 시작된 파시즘은 결국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고, 이제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고 있다. 진정한 변화는 정치권력의 교체가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자리 잡은 서열화와 경쟁 논리를 해체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