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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다름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의 병리학

양상현 기자 2025. 4. 19. 02:38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를 왜 그토록 증오하는가

지하철에서 우연히 목격한 장면이다. 한 중년 남성이 스마트폰으로 정치 뉴스를 보다가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XX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그는 주변 승객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분노를 표출했다.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단지 자신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접했을 뿐인데, 마치 누군가 그의 가족을 해친 것처럼 격분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자기와 다른 견해나 생각을 가진 사람의 존재 자체를 점점 더 견디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존재 자체'가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런 존재를 마치 바이러스나 세균처럼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이는 일종의 병리적 현상이다. 결벽증이나 편집증과 맥이 닿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감히 나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 이런 사고방식에서 분노와 증오가 생겨나고, 그 존재를 완전히 제거할 때까지 이 감정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분노사회'로 변모한다. 없앨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끝없는 분노는 결국 자신을 소진시킬 뿐이다.

얼마 전 내가 본 드라마에 대한 가벼운 감상을 SNS에 올렸다가 뜻밖의 경험을 했다. 몇몇 사람들이 댓글과 메시지로 격한 비난을 쏟아냈다. 그들은 내가 드라마의 특정 캐릭터나 장면을 그들과 다르게 해석했다는 이유만으로 분노했다. 정치나 종교도 아닌, 단지 드라마에 대한 의견 차이로도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물론 삶에는 정당하고 의로운 분노도 존재한다. 불의에 맞서는 분노,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분노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누군가 평생을 '의로운 분노'에 바쳐 살기로 했다면, 그 또한 존중받아야 할 선택이다. 그런 사람은 아마 죽을 때까지 세상과 투쟁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넘쳐나는 것이 실천적이고 정의로운 분노인지, 아니면 단순히 '다름'을 히스테리적으로 견디지 못하는 증오인지는 진지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내 경험으로는 후자가 훨씬 더 많다. 소셜미디어를 보면 사소한 의견 차이로도 극단적인 언어폭력이 오가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지난 주말, 친구와 식사를 하다가 정치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대화는 평화롭게 이어졌다. 서로의 관점을 경청하고, 동의하지 않더라도 상대의 생각이 형성된 배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질 때, 친구가 말했다. "오랜만에 편안하게 정치 얘기를 했네. 요즘은 이런 대화가 거의 불가능해."

이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우리는 언제부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의견 차이가 인격 살해의 이유가 되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정의로운 분노를 실천하기 이전에, 다름을 견디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내 삶에서는 나와 '다른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히스테리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그 현실을 차분히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실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 역시 완벽하지 않고, 실수를 저지르며, 때로는 편협한 사고에 빠지기도 한다. 나도 과거에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분노했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이 세상은 깨끗한 무균실이 아니며, 어쩌면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제거해야 할 바이러스'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불완전하고 모순적이다. 그렇기에 다름이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분노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건강한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름을 견디는 능력, 그것이 어쩌면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