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흙과 식물이 치유하는 마음의 상처
경기도 치유농업 현장에서 만난 새로운 희망
텃밭에 무릎을 꿇고 흙을 만지는 순간,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우울증으로 3년간 집 밖으로 나오기를 꺼렸던 김영숙(64·가명) 씨는 경기도치유농업센터의 프로그램에 참여한 지 한 달 만에 달라졌다. "흙을 만지고 식물이 자라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져요. 약보다 더 효과가 좋은 것 같아요."
경기도농업기술원이 4월부터 10월까지 운영하는 '2025년도 치유농업 전문프로그램'은 농업과 농촌 자원을 활용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새로운 시도다. 정신건강 고위험군, 노인, 스트레스 고위험군 등 사회적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체험을 넘어 과학적 검증을 통해 그 효과를 입증하고 있다.
"치유농업은 농업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과정입니다." 경기도치유농업센터 김민정 팀장의 말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농업을 식량 생산의 수단으로만 바라봤어요. 하지만 농업 활동이 주는 심리적, 정서적 효과는 놀랍습니다. 식물을 돌보는 과정에서 책임감이 생기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희망을 얻습니다. 무엇보다 자연과의 교감은 현대인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프로그램은 시기별로 다양한 주제로 진행된다. 봄에는 '콩이 나를 치유한다고?'라는 주제로 콩을 심고 가꾸는 과정을 통해 인내와 기다림을 배운다. 여름에는 '텃밭정원 감정과 생각노트'를 통해 채소를 기르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익힌다. 가을에는 '마음을 치유하는 정서곤충' 프로그램으로 곤충과의 교감을 통해 공감 능력을 키운다.
참가자들은 그룹별 10명 내외로 구성되어 8회에 걸쳐 집중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이들은 관계기관의 추천을 통해 선발됐으며, 대부분 우울증, 불안장애 등 정신건강 문제를 겪고 있거나 사회적 고립 상태에 놓인 이들이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두려웠어요."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박지영(62) 씨의 말이다. "하지만 함께 흙을 만지고, 씨앗을 심고, 물을 주다 보니 어느새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게 됐어요. 식물이 자라는 것처럼 우리의 관계도 자라더군요. 요즘은 프로그램 날짜만 기다립니다."
경기도농업기술원은 이 프로그램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교육 전후로 뇌파 분석, 우울감, 스트레스, 자아존중감, 회복탄력성, 신체활력 등 다양한 심리·정신 건강 지표를 측정하고 있다. 초기 결과는 고무적이다. 참가자들의 우울감과 스트레스 지수는 평균 20% 감소했으며, 자아존중감과 회복탄력성은 15% 이상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성제훈 경기도농업기술원장은 "치유농업은 농업의 새로운 역할을 보여주는 분야"라며 "이번 프로그램이 도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농업인의 소득 증대에도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치유농업은 농업인에게도 새로운 기회다. 경기도 화성시에서 치유농장을 운영하는 이상호(58) 씨는 "처음에는 농사만 짓다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중 치유농업을 알게 됐다"며 "지금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농장에서 웃고 치유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2020년 '치유농업 연구개발 및 육성에 관한 법률' 제정 이후, 치유농업은 제도적 기반을 갖추고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경기도는 2022년 경기도치유농업센터를 개소하고, 치유농업 전문인력 양성과 프로그램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러나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치유농업에 대한 인식 부족과 전문인력 양성, 표준화된 프로그램 개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또한 치유농업의 효과를 의료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과학적 근거 마련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농업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현대사회의 정신건강 문제가 심각해지는 가운데,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치유는 약물치료나 상담치료를 보완하는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또한 농촌에는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도시민에게는 치유의 공간을 제공하는 윈-윈 모델로서의 가치도 크다.
흙과 식물, 그리고 사람이 만나는 치유농업의 현장. 그곳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자연과의 연결,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과의 화해를 다시 찾아가고 있다. 경기도의 치유농업 프로그램이 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