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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데이터와 환경, 근로자 안전까지 잡는 R2v3

양상현 기자 2025. 4. 22. 23:36

 IT자산 처리의 국제표준 R2, 최신 개정의 길목에서 바뀐 것들



전자기기 재활용의 국제표준 ‘R2’가 한 단계 더 까다롭고 체계적으로 진화했다. 최근 업데이트된 R2v3 인증은 IT자산 처리 산업의 새로운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국내 상황은 아직 갈 길이 멀다.

한국에서는 가전 폐기나 물리적 처리에 대한 인허가는 있지만, 디지털 기기 내부 데이터 삭제부터 재사용, 최종 재활용까지 ‘통합 인증’ 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기존 폐기물 관리체계가 눈에 보이는 물리적 폐기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ITAD(IT자산처리) 업계에선 “정보보안·환경·안전이 한꺼번에 고려되는 국제인증이 절실하다”는 요구가 높았다.

이런 공백을 메워주는 것이 북미권을 중심으로 확대되는 ‘R2(Responsible Recycling)’ 표준이다. 미국의 비영리단체 SERI가 개발한 R2 표준은 국제표준인 ISO 9001(품질), 14001(환경), 45001(안전보건), 27001(정보보안) 기능을 통합적으로 요구한다. 여기에 전자기기의 재사용·재활용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데이터유출, 환경오염, 근로자 사고까지 포괄적으로 다룬다.

국내 ITAD 서비스업체 리맨은 “IT장비의 중고 유통과 재활용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위해 이전부터 ISO 9001·14001·45001·27001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국제표준만으로는 전자기기 특성에 맞춘 세밀한 기준이 부족해 R2를 준비했다”며 “지난해 R2v3 인증을 공식 획득, 데이터보안·전자기기 재제조·시설 안전·업무 역량까지 객관적으로 검증받았다”고 밝혔다.

실제로 R2v3 인증을 얻은 국내 업체는 아직 손에 꼽힐 정도다. 새롭게 바뀐 R2v3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업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 더 엄격해진 R2v3…변화의 다섯 가지 키워드

R2는 2008년 도입 이래 전자기기 순환 자원화의 ‘사회적 약속’ 같은 존재로 진화해왔다. 2020년 발표된 R2v3는 업계 변화를 반영해 다섯 가지 점에 초점을 뒀다. 기술 진화, 데이터보안·개인정보 보호 규제 강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 책임, 국가별 수출입 규제와 추적성 확보, 그리고 조직과 산업의 유연성을 보장하는 모듈화 구조가 그것이다.

예컨대, SSD(고속 저장장치)나 대용량 복합기기의 등장과 함께 데이터 삭제 체계도 강력해졌다. 모든 저장장치의 사용 이력과 삭제 내역을 고유 식별자 단위로 추적·기록하고, 삭제 실패시 즉시 물리적 파쇄로 전환해야 한다. 근로자 안전과 환경보호도 R2의 핵심이다. 일명 ‘중점관리물질(Focus Materials, FMs)’로 분류되는 납·수은·배터리·PCB(인쇄회로기판) 등은 각 단계별로 분리, 문서화, 최종처분까지 추적이 요구된다.

시설 역시 R2 기준에 걸맞은 하드웨어를 갖춰야 한다. 수은·납 등 유해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을 정기적으로 파악하고, 위험물 분리 저장, 누출 방지 설비, 폐수처리, 작업환경 보안까지 개별적으로 따져야 한다. “한국에서 이 기준을 모두 만족하려면 종합재활용업 인증도 충족해야 한다. 국제인증은 단순히 서류로 통과되지 않는다”는 게 리맨 관계자의 이야기다.

다운스트림(Downstream) 관리도 까다로워졌다. 전자폐기물이 다음 업체로 옮겨져 최종 처리될 때까지 R2기준을 만족하는 업체만 다룰 수 있다. 만약 재처리 중간에 공급처가 바뀐다면, 고객과 SERI에 즉시 알리고 관리대장을 갱신해야 한다. “오래 전엔 중간업체 관리가 느슨했지만, R2v3는 추적성·투명성이 생명”이라는 평가가 많다.

◇ 재사용 역시 철저한 관리체계로

재사용·리퍼비시를 위해선 반드시 ‘재사용 계획(R2 Reuse Plan)’을 세워야 한다. 제품 기능, 데이터 삭제, 품질보증, 반품정책까지 모두 명확히 문서화한다. 테스트와 수리작업 모두 정해진 기준, 교육받은 작업자에 의해 이뤄져야 하며, 모든 장비의 안전·품질 상태는 목록화해서 등급별로 나눠 기록·관리해야 한다.

업계가 R2v3의 이같은 강화 규정을 ‘불편’이 아니라 ‘신뢰와 책임의 기초’라 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R2v3는 전체 전자기기 유통과 자원순환의 모든 경로에 ‘기록’과 ‘추적’, ‘보안’, ‘안전’이 스며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리맨 관계자는 “R2v3는 단순한 자원 재활용 이상이다. ITAD 산업신뢰·품질·환경책임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며 “고객들도 단순히 ‘제품만 다룬다’가 아니라, 처리 전 과정의 체계와 투명성을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마지막으로, R2v3는 변화의 빠른 산업 환경과 각 기업 특성에 맞는 ‘모듈식’ 적용이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글로벌 공급망과 전자폐기물 관리의 복잡성이 커지는 만큼, 점점 더 많은 한국 기업들이 이 국제인증을 도입하고 있다.

“앞으로 전자기기·ITAD 시장에서 어떤 업체가 진정한 책임을 다하는지, 그리고 그런 기준을 가진 인증이 선택받을 것”이라는 현장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린다. IT산업 변화의 최전선에서, R2v3 인증은 이제 ‘기술과 신뢰, 환경과 안전을 잇는 새로운 기본’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