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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손글씨에 담긴 민주주의의 체온

양상현 기자 2025. 3. 29. 01:47

SNS 릴레이 캠페인이 보여주는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저항



디지털 시대에 손글씨는 점점 희귀해지는 의사소통 방식이다. 키보드와 터치스크린이 우리의 손가락을 점령한 지금, 펜을 들고 종이에 글자를 새기는 행위는 일종의 의식(儀式)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SNS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윤석열 파면 손글씨 릴레이 캠페인'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전현희 최고위원의 손글씨에는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라는 짧은 문장이 담겨 있다. 그녀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적었다"고 말한다. 이 표현에 주목해보자. 디지털 메시지가 가벼운 터치 한 번으로 전송되는 세상에서, '꾹꾹 눌러 적는다'는 행위는 의지의 무게를 실어주는 물리적 과정이다. 손글씨는 그 사람의 체온과 호흡, 심지어 당시의 감정 상태까지 담아낸다.

이 캠페인이 흥미로운 것은 가장 현대적인 소통 플랫폼인 SNS와 가장 전통적인 표현 방식인 손글씨의 결합이라는 점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이 기묘한 만남은 현 시대 정치적 저항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다. 해시태그로 연결되는 디지털 연대와 손글씨에 담긴 개인의 진정성이 결합된 하이브리드 저항인 셈이다.

손글씨 릴레이가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시간성'이다. 타이핑은 순식간에 이루어지지만, 손글씨는 시간이 걸린다. 특히 정성스럽게 한 글자씩 쓰는 과정은 그 메시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을 준다. 전현희가 말한 "내란성 불면증"이라는 표현처럼, 많은 이들이 헌재의 결정을 기다리며 밤잠을 설치고 있다. 손글씨를 쓰는 느린 시간은 이런 기다림의 시간과 묘하게 공명한다.

이 캠페인은 또한 정치인들 사이의 연결망을 가시화한다. 전현희는 유동수, 한준호, 이정헌 의원의 지명을 받았고, 다시 안규백 의원을 지목했다. 이런 지목 방식은 마치 전통 사회의 구전 문화를 연상시킨다. 메시지가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전해지며, 그 과정에서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캠페인이 단순한 정치적 구호를 넘어 일종의 주문(呪文)처럼 기능한다는 것이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라는 문장 자체가 헌법재판소의 결정문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이는 마치 바라는 결과를 미리 말함으로써 그 실현을 앞당기려는 주술적 행위와도 닮아 있다. 디지털 시대의 정치적 주술이라고나 할까.

물론 이 캠페인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이를 정치인들의 자기 과시나 집단 동조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손글씨의 진정성을 강조하면서도 결국은 디지털 플랫폼의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모순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손글씨 릴레이 캠페인은 현대 정치 참여의 흥미로운 단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개인의 진정성과 집단의 연대, 아날로그적 표현과 디지털 확산, 전통적 의례와 현대적 소통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전현희의 글에서 "한 달째 내란성 불면증을 앓고 계십니다"라는 표현은 현 정치 상황이 많은 이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을 드러낸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개인의 일상에까지 침투하여 수면 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가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신체적 경험으로 체감된다는 의미다.

손글씨 릴레이 캠페인은 결국 디지털 시대의 정치적 참여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창이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 표현 방식과 가장 새로운 소통 플랫폼의 만남을 통해, 민주주의적 열망을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글씨에는 그들의 정치적 신념뿐만 아니라, 그 글자를 쓰는 순간의 감정, 체온, 그리고 시간이 담겨 있다. 디지털 시대에 이런 아날로그적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저항하는 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