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헌법이 남긴 최후의 보루, 국회의 비상대권
헌정 질서의 위기 앞에서 87년 헌법의 지혜를 돌아보다
대한민국이 유례없는 헌정 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통령 탄핵 심판을 앞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어떻게 나오든, 그 결과는 국가적 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탄핵이 기각될 경우, 구속 기소 상태의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고, 헌재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사법적 공백이 장기화할 수 있다. 이처럼 법과 정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1987년 헌법이 남긴 장치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87년 헌법은 독재 정권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김영삼, 김대중 등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인사들이 참여한 이 헌법은 권력 균형을 핵심 원칙으로 삼았다. 대통령에게 강한 권한을 부여했지만, 국회에는 그보다 더 강력한 견제 수단을 보장했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지만, 국회는 이를 무력화할 수 있고,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지만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없다. 이는 군사 독재 시절과 같은 비민주적 권력 행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장치였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국회의 광범위한 탄핵 권한이다. 국회는 대통령뿐만 아니라 행정부와 사법부의 주요 공직자, 모든 판사와 검사를 탄핵할 수 있다. 이 권한은 단순한 견제를 넘어,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회가 헌정 질서를 수호하는 최후의 방어선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다. 국회는 일정 수 이상의 국무위원을 탄핵함으로써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력화하고, 법률 공포권을 국회의장에게 이양할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는 모든 국무위원을 탄핵해 행정부 기능을 정지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이는 헌법 질서가 심각한 위협을 받을 때 국회가 행사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다.
더 나아가, 헌법재판소 재판관에 대한 탄핵 역시 국회의 권한이다. 헌재 재판관이 탄핵될 경우 해당 재판관은 직무가 정지되며, 이는 헌재의 심판 기능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 헌재가 헌법을 수호해야 할 위치에서 오히려 헌법 질서를 위협할 때, 국회가 개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현재 국회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분명하다. 탄핵이 기각되거나 무결정 상태가 이어질 경우, 국회는 권한대행을 포함한 다수의 국무위원을 탄핵해 법률 공포권을 국회의장에게 가져올 수 있다. 이를 통해 특검법을 즉시 발효시키고, 행정권을 국회로 이전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도 있다. 만약 헌재가 탄핵을 기각한다면, 국회는 기각에 찬성한 재판관을 탄핵해 헌재의 기능을 정지시킬 수 있다. 무결정 상태가 되더라도, 행정권이 국회로 넘어가 있다면 헌정 질서는 유지될 수 있다.
이런 방안이 급진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핵심은 피를 흘리지 않고 권력을 경쟁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이 유혈사태 없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것처럼, 우리도 헌법이 마련한 장치를 통해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 권한을 행사할 용기다. 과거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에게 주어진 강력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검찰 개혁에 실패했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때로는 결단이 필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회, 특히 다수당의 명확한 입장 표명이다. 헌정 위기 상황에서 국회가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분명히 밝혀 국민을 안심시키고, 헌재가 신중한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해야 한다. 국회에 부여된 비상대권은 남용되어서는 안 되지만, 헌정 질서가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주저 없이 행사해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국가 권력의 정점이 아니다. 국민이 정점이며, 국민이 선출한 국회가 그다음이다. 87년 헌법은 이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다. 헌법이 마련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지금의 위기를 평화적으로 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