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0. 7. 11:57ㆍ카테고리 없음
『가나다라: 세상 모든 소리를 적는 문자』… 사라진 네 글자로 돌아보는 훈민정음의 원리와 가능성

K팝을 듣고 K드라마를 보던 세계인들이 이제 한국을 찾아와 한국어를 배운다.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언어를 익히려는 열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한국어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많이 학습되는 언어로 꼽히는 시대다.
세종학당의 성장세는 이 변화를 보여준다. 2007년 3개국 13곳, 수강생 740명으로 출발한 세종학당은 89개국 273곳, 연간 수강생 23만9000명 규모로 커졌다. 신규 지정 경쟁률도 2021년 3.3대 1에서 2025년 8.5대 1로 높아졌다.
과거 강대국의 언어가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타고 퍼져나갔다면, 오늘날 한국어의 확산에는 한국 문화와 콘텐츠를 즐기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선택이 큰 몫을 한다. 그렇다면 정작 우리는, 날마다 읽고 쓰는 한글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현준의 『가나다라: 세상 모든 소리를 적는 문자』(해향출판·2026년 10월 9일)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25년간 외국어 교육 사업에 몸담아온 저자가 누적 조회 수 500만 회를 기록한 유튜브 특강 ‘우리가 몰랐던 훈민정음의 비밀’을 책으로 풀어냈다. 훈민정음 반포 580년, 한글날 제정 100년을 맞는 해에 한글의 과거를 돌아보고 다음 가능성을 묻는다.
■ 바그다드의 기록에서 세종의 문자까지
책의 출발점은 뜻밖에도 9세기 바그다드다. 저자는 846년 이븐 쿠르다지바가 쓴 『도로와 왕국 총람』에서 오늘날 한류의 먼 원형을 찾는다. 중국 너머 동쪽의 신라를 풍요로운 나라로, 외지인이 찾아와 머물고 싶어 하는 곳으로 묘사한 기록이다.
이를 오늘날의 한류와 곧바로 등치할 수는 없다. 다만 저자는 ‘황금의 나라’ 신라,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 이야기, 대식국과 회회인의 흔적을 따라가며 한반도와 바깥세계의 교류가 오래전부터 이어져왔음을 보여준다. 1부 ‘1,200년 전 한류 열풍’은 그렇게 신라에서 출발해 인류의 문자사를 거쳐 세종으로 향한다.
이어지는 2부 ‘인류 문자 이야기’는 문자의 탄생과 한자 중심 문자 생활의 제약, 동아시아 여러 문자 체계의 고민을 짚는다. 한글을 익숙한 일상의 도구가 아니라 인류 문자사의 한 장면으로 바라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 긴 우회 끝에 책은 핵심 질문에 도착한다. 세종이 만든 글자는 스물여덟 자인데, 왜 지금 우리는 스물네 자를 쓰고 있을까.
■ 사라진 네 글자가 던지는 질문
아래아(ㆍ), 반치음(ㅿ), 여린히읗(ㆆ), 옛이응(ㆁ). 오늘날 한글의 기본 자모에서 빠진 네 글자다.
책은 이 글자들의 자취를 따라가며 훈민정음의 원리를 되짚는다. 자음의 기본자는 발음기관의 모습을 본뜨고, 소리의 성질에 따라 획을 더해 관련 글자를 만들어낸다. 모음 역시 일정한 원리에 따라 구성된다. 낱자를 조합해 수많은 음절을 적을 수 있는 한글의 힘은 이러한 체계성에서 나온다.
저자의 관심은 옛글자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라진 네 글자와 제자 원리에 한글의 표현 영역을 넓힐 실마리가 있다고 본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이름이다. 세종은 새 문자에 훈민정‘자(字)’가 아니라 훈민정‘음(音)’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저자는 여기서 우리말을 적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소리를 표현하려는 구상을 읽어낸다. 조선에서 훈민정음을 활용해 조선 한자음뿐 아니라 중국 한자음도 기록하려 했다는 사실은 그 가능성을 살펴볼 단서가 된다.
물론 이름과 역사적 활용만으로 훈민정음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온전히 적을 수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책의 흥미는 그 완결성을 입증하는 데 있기보다, 익숙한 문자에 새로운 쓰임을 제안하는 데 있다.
■ 외국어를 배우는 또 하나의 도구
외국어를 한글로 옮겨 적다 보면 서로 다른 소리가 같은 글자로 표기되곤 한다. 영어의 b와 v, f와 p, l과 r이 대표적이다. 한글 표기만으로는 원어의 발음 차이를 충분히 드러내기 어려운 경우다.
저자는 옛글자와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를 외국어 학습에 활용해보자고 제안한다. 현재 사용하는 스물네 자를 바꾸거나 일상의 표기 체계를 과거로 되돌리자는 주장은 아니다. 외국어 교육과 발음 표기라는 별도의 영역에서 한글의 가능성을 실험하자는 것이다.
“1443년의 제자 원리를 알았다면 영어도 한글을 발음기호로 채택했을 것”이라는 상상은 다소 대담하다. 그러나 그 상상이 겨냥하는 질문은 구체적이다. 한글을 외국어의 소리를 더 세밀하게 구별하고 익히는 학습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추천사를 쓴 홍후조 고려대 교수도 이 지점을 짚는다. “b와 v, f와 p, l과 r을 구별하는 소리를 한글로 나타낸다면 외국어를 더 쉽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제안이 교육 현장에서 얼마나 유용할지는 실제 적용과 검증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학습자가 새로운 표기법을 쉽게 익힐 수 있는지, 원어의 발음을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하는지도 살펴볼 과제다. 책은 그 논의의 출발점으로 훈민정음의 원리를 다시 펼쳐 보인다.
■ ‘팍스 코리아나’, 지배가 아닌 선택의 시대
4부 ‘훈민정음 해례본’은 문자의 원리를 설명하는 책이 어떻게 시간을 건너 살아남았는지 따라간다. 반포 이후의 굴곡과 오랜 세월 끝의 공식 인정,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해례본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한글이 실은 창제와 전승, 보존의 여러 고비를 통과한 유산임을 돌아보게 한다.
마지막 5부의 제목은 ‘팍스 코리아나’다. 저자가 그리는 미래는 힘으로 다른 나라를 굴복시키는 패권의 질서와는 다르다. 세계인이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좋아해 스스로 선택하고 참여하는 시대에 가깝다.
그 구상 속에서 한글은 한국인만의 문자를 넘어선다. 세계인이 한글로 자신의 이름을 쓰고, 나아가 자신의 언어를 기록하는 도구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국가 차원의 결정을 기다리기보다 민간과 교육 현장에서 먼저 실험해보자고 권한다.
추천사들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호응한다. 구글 본사 시니어 엔지니어 황태섭은 해외에서 25년을 살아오는 동안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닫게 해준 책이라고 평했다. 박상원 세계한인재단 총재는 이민 3세대에 이르러 조부모와 손주가 통역 없이는 대화하지 못하는 현실을 언급하며 한글 세계화의 의미를 강조했다.
『가나다라』는 한글의 우수성을 확인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책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문자를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묻는다. 역사적 사실과 저자의 해석, 미래를 향한 상상을 구분해 읽을 필요는 있지만, 그 질문만큼은 선명하다.
세종이 만든 스물여덟 글자와 우리가 쓰는 스물네 글자 사이. 이 책은 그 네 글자의 빈자리에서 한글의 지나온 길과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함께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