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5. 13:16ㆍ카테고리 없음
47명의 주민이 지키는 세토 내해의 숨겨진 보석
일본 세토 내해의 작은 섬 이누지마에 발을 디디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이 온몸을 감싼다. 녹슨 굴뚝과 붉은 벽돌 건물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이곳은 100년 전 산업화의 흔적과 현대 예술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공간이다.
"처음 이 섬에 왔을 때는 그저 버려진 폐허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매일 아침 이 풍경을 보는 것이 행복합니다."
5년 전 본토에서 이주해 미술관 가이드로 일하는 요시다 마사코(42)의 눈에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그녀의 안내를 따라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 바다 내음과 함께 녹슨 금속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이누지마 제련소는 1909년 문을 열었지만 불과 10년 만에 폐쇄됐다. 그러나 그 흔적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섬을 지배했다. 2008년, 이 버려진 산업 유산은 세토우치 트리엔날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미술관 내부로 들어서자 인공 조명 없이 자연광만으로 채워진 거대한 공간이 펼쳐진다. 천장의 틈새로 스며드는 빛줄기가 콘크리트 바닥에 그림자 패턴을 만들어낸다. 이 순간, 폐허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에어컨이나 인공 조명을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죠. 하지만 그것이 이 공간의 진정성입니다. 방문객들이 자연과 건축, 예술이 어우러지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요."
미술관 큐레이터 다나카 히로시(38)는 손으로 벽면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그의 손길에서 이 공간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미술관 중앙에는 일본 현대미술의 거장 쿠사마 야요이의 대형 설치작품 '점멸하는 영혼'이 자리하고 있다. 붉은 벽돌 벽과 대비되는 형형색색의 조형물은 마치 산업 시대의 유령과 대화하는 듯하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왜 이런 낡은 건물에 돈을 들이는지. 하지만 지금은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섬의 역사가 예술이 되었으니까요."
40년 넘게 이누지마에 살아온 주민 사토 게이코(78)는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녀의 집 창문에서는 미술관의 굴뚝이 보인다. 한때 공해의 상징이었던 그 굴뚝은 이제 그녀의 일상에 스며든 풍경이 되었다.
미술관을 나와 섬을 걷다 보면 곳곳에 버려진 가옥들이 눈에 띈다. 한때 1,500명이 넘는 인구로 북적였던 이 섬은 현재 47명의 고령 주민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 버려진 공간들은 '하우스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해안가에 위치한 '시사이드 이누지마 갤러리'에 들어서자 바다와 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세토 내해의 풍경이 갤러리 내부의 작품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이곳에서 만난 관람객 김지영(35)은 깊은 감동을 감추지 못한다.
"한국의 폐광이나 폐공장도 이렇게 재생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버려진 것들이 새로운 가치를 찾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이누지마의 매력은 접근성의 어려움에서도 비롯된다. 하루 3회 운행되는 페리로만 접근할 수 있는 이 섬은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나오시마나 데시마와 달리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다.
"접근성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누지마의 매력입니다. 이곳에서는 온전히 예술과 자연, 그리고 역사에 집중할 수 있죠."
세토우치 트리엔날레 조직위원회의 나카무라 켄지(45) 디렉터는 이누지마의 가치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말처럼, 이누지마를 찾는 이들은 단순한 관광객이 아닌 '순례자'에 가깝다.
해 질 녘, 제련소 미술관은 황금빛 석양에 물든다. 100년 전 산업화의 상징이었던 이 공간은 이제 쇠락과 재생, 자연과 인공,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예술의 장이 되었다. 인구 47명의 작은 섬이 품은 거대한 예술적 야망은, 쇠락해가는 것들 속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인간의 창조적 정신을 보여준다.
미술관을 나서며 바라본 세토 내해의 일몰은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아름답다. 이누지마의 진정한 매력은 어쩌면 예술과 자연, 역사가 경계 없이 어우러지는 이 순간에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