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6. 19:31ㆍ카테고리 없음
위정척사의 상징에서 현대 애국심의 표상으로... 면암 정신의 현대적 계승 조명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를 관통하며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 최익현의 삶과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1907년 일본 쓰시마섬에서 순국한 최익현(호 면암)은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한 항일 투쟁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최익현은 23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섰다. 특히 그의 정치적 행보는 타협을 모르는 강직함으로 특징지어진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 등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여러 차례 유배를 당했음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면암숭모사업회 유왕현 회장은 "최익현은 단순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당시 시대 상황에서 나라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고뇌했던 지식인"이라며 "그의 위정척사 사상은 외세에 의한 국권 침탈에 대한 저항 의식의 표현이었다"고 설명했다.
최익현의 항일 활동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본격화됐다. 그는 '창의토적소'를 올리고 백성들에게 일본 상품 불매운동과 납세 거부를 호소하며 민족적 저항을 이끌었다. 1906년에는 7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전북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해 일본군에 맞섰다.
독립운동사 연구가 박민호 교수는 "최익현의 의병 활동은 비록 군사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민족 저항의 상징적 의미가 컸다"며 "특히 남원에서 진위대와 충돌했을 때 동족 간 살육을 피하기 위해 의병대를 해산한 결정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체포된 최익현은 일본 쓰시마섬으로 압송되어 감금 생활을 하다 풍토병과 단식 투쟁으로 1907년 1월 1일 순국했다. 그의 시신은 부산으로 옮겨져 많은 시민과 유림들의 애도 속에 조국 땅에 묻혔다.
최익현은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시문집 『면암집』은 한말 정치 상황과 위정척사론자들의 정신을 담고 있어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면암숭모사업회 유왕현 회장은 "최익현의 정신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며 "그가 보여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과 나라를 위한 희생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최익현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현재 포천시는 최익현의 생가 복원과 면암광장 조성 등을 통해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포천시 관계자는 "최익현은 포천이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것은 지역의 정체성 확립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통해 면암의 정신을 알리는 데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역사학자들은 최익현의 생애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평가한다. 한국근대사학회 정진우 회장은 "최익현이 보여준 민족적 자존심과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은 시대를 초월한 가치"라며 "그의 삶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한다"고 말했다.
최익현의 삶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오늘날 한국인의 정체성과 애국심을 형성하는 중요한 정신적 유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