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9. 11:19ㆍ카테고리 없음
한국 천주교 역사의 요람, 당진 신평 일대 공소 답사기
김야천 씨가 최근 방문한 당진 신평 일대의 들판은 석양이 물드는 고요함 속에 깊은 역사를 품고 있었다. 이곳은 한국 천주교 역사의 중심지인 내포지역의 일부로, 한때 신앙의 열정으로 가득했던 공소들이 점차 잊혀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다.
내포지역은 한국 천주교의 요람이라 불린다. 1784년 말에서 1785년 초, 여사울(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출신 이존창이 권일신의 가르침을 받아 입교한 후 가족과 친지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하면서 이 지역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다. 1865년 선교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국 신자의 절반 이상이 충청도에 거주했고, 그중 절반이 내포 사람이었다고 한다.
"내포지역에는 100개 이상의 교우촌과 공소가 집중됐었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가장 큰 특징인 '신앙의 자발적 수용', '박해 속 순교', '눈부신 성장', '한국문화와의 융합' 등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바로 이 지역입니다."라고 당진문화원 김영호 향토사 연구원은 설명했다.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내포지역 성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많은 공소들은 본당 설립과 급격한 이농현상,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그 기능을 상실하고 쇠락해가는 실정이다.
최근 당진시의회 최연숙 부의장과 함께 한정리, 매산리 일대의 공소들을 답사했다. 좁은 농로를 따라 이어진 길에는 뒤뚱거리는 오리 몇 마리가 한가롭게 걸어다니고, 석양에 물든 들판은 평화로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곧 농부들의 부지런한 손길로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될 예정이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 반경 500여 미터 안에 공소 3개가 2~3년 간격으로 설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박해 시기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이 지역 신앙공동체의 열정을 짐작케 한다.
"이 지역 공소들은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한국 천주교의 자생적 발전과 문화적 융합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하지만 본당이 세워지고 이농향도로 마을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또 자가용 등 교통수단이 확대되면서 공소의 기능이 급격히 저하됐습니다."라고 최연숙 부의장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당진시는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식하고 지역 공소들의 보존과 활용 방안을 모색 중이다. 시 관계자는 "내포지역의 천주교 유산은 단순한 종교적 의미를 넘어 한국의 근대사와 문화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라며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지역 주민들은 점차 사라져가는 공소의 흔적을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한 자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정리 주민 박상철 씨(67)는 "어릴 적 공소에서 미사를 드리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제는 찾는 이도 없고 건물만 남아 있어 안타깝다"며 "마을 어르신들의 구술을 녹음하고 사진을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화는 불가피하지만, 내포지역의 공소들이 간직한 신앙과 문화의 유산은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가치임이 분명하다. 노을 지는 신평의 들판에서, 한국 천주교의 자생적 역사가 숨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