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11. 08:53ㆍ카테고리 없음
현대 사회의 갈등 해소를 위한 상대성의 지혜
어제 저녁, 동창 모임 식사 자리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왔다. 순간 식탁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친구 A와 B는 보수 성향이 강했고, 나와 C는 진보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피했을 주제였지만, 이번에는 대통령의 파면 선고가 지난 주에 나온 만큼 대화를 이어갔다. 결과는? 예상대로 서로의 입장만 확인하고 불편한 침묵으로 끝났다. 이런 경험은 비단 우리 동창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한국 사회는 지금 극단적 양극화의 늪에 빠져 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가족 모임이 깨지고, 오랜 친구 사이가 멀어지는 일이 흔해졌다. 이런 갈등의 핵심에는 '내 가치관은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상대방의 의견은 단순히 다른 관점이 아니라 '틀린 것', 심지어 '악한 것'으로 규정된다.
최근의 정치 상황을 보면 이런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한쪽에서는 상대를 '내란 동조 세력'이라 부르고, 다른 쪽에서는 '적폐 세력'이라 규정한다. 이런 프레임은 대화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한다. 누가 악의 세력과 대화하고 싶겠는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상대를 극단적으로 몰아붙일수록 그들은 더욱 단결하게 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적폐 청산'을 외치던 목소리가 결국 반대 세력을 더 강하게 결집시킨 것처럼 말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정치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종종 자신의 가치관을 절대화한다. 아이 교육 방식을 두고 부부가 대립하거나, 회사에서 업무 방식을 놓고 세대 간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내 방식이 옳다"는 확신은 대화를 단절시키고 갈등만 키운다.
그렇다면 이런 갈등의 악순환을 끊을 방법은 없을까? 첫 번째 단계는 가치관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옳고 상대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기독교인과 불교인, 노인 세대와 청년 세대, 남성과 여성이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가 다른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있다.
특히 현대 사회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압축된 다원주의' 상황이다. 과거에는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살았지만, 이제는 전 세계 사람들이 한 도시에서, 심지어 한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종교, 국적, 세대, 성별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려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중요한 인식은 가치관이 '형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믿는 가치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은 내가 자란 환경, 받은 교육, 경험한 사건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만약 내가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면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졌을 수도 있다. 이런 인식은 자신의 가치관을 절대화하는 경향을 완화시킨다.
가치관의 상대성과 형성 과정을 인정한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다. 이것이 바로 정치의 본질이다. 정치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기 위한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대의 의견을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태도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결정하지만, 그것이 소수의 의견을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소수의 목소리도 존중하며 최대한의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때로는 양보가 필요하고, 때로는 창의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한 방에서 온도 조절을 두고 갈등이 생긴다면, 중간 온도로 타협할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번갈아 조절할 수도 있으며, 여의치 않다면 공간을 분리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이런 과정은 쉽지 않다. 특히 오랫동안 자신의 가치관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온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극단적 대립을 넘어 건강한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인식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다음 번 동창 모임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온다면, 나는 다른 접근을 시도해볼 생각이다. "우리 생각이 다른 건 당연해. 서로의 입장을 들어보자"라는 태도로 시작한다면, 비록 합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서로를 이해하는 첫걸음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절대적 가치관의 함정에서 벗어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분열된 사회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첫 번째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의 방법을 찾아가는 여정.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길이자 평화로 가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