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13. 22:34ㆍ카테고리 없음
전국 인문계 고등학교, 제도와 현실의 간극에 신음하다
2025년 4월, 전국 인문계 고등학교는 말 그대로 ‘태풍 전야’의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올해부터 전격 시행된 고교학점제가 학교 현장을 뒤흔들며 혼란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정부는 오랜 준비 끝에 이 제도를 도입했다고 자부했지만, 시행 한두 달 만에 폐지 청원 요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내란 사태로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 속에서도, 교육 현장의 이 심각한 문제를 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서울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를 찾아 고교학점제 시행 이후의 생생한 풍경을 들여다봤다.
학교 복도는 아침부터 어수선하다. 고1 학생들은 새로 도입된 학기제와 교과 선택에 대해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벽에 붙은 시간표는 고1과 고2, 고3이 뒤섞인 ‘한 지붕 두 학교’ 체제를 여실히 보여준다. 고1은 2022 개정 교육과정을, 고2와 고3은 이전 2015 개정 교육과정을 적용받아 수업과 평가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교사 휴게실에 들어서자 한숨과 불만이 섞인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한 교사는 책상에 쌓인 서류를 가리키며 “고1 수업은 학기제로 운영되고, 고2, 고3은 학년제로 진행되니 수업 준비부터 평가까지 모든 게 달라요. ‘걸치기 수업’ 하는 교사들은 부담이 몇 배로 늘었죠”라며 고개를 저었다.
고교학점제의 취지는 분명 매력적이다. 학생들이 흥미와 적성에 따라 교과를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한다는 점에서 교육의 자율성을 높이려는 의도는 나무랄 데 없다. 실제로 학교마다 개설 교과 수가 크게 늘어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도 사실이다. 한국사 같은 필수 지정 교과를 제외하면, 학생들은 자유롭게 원하는 과목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제도의 이상과 동떨어져 있다. 한 고1 학생은 “교과 선택이 자유롭다지만, 뭘 선택해야 대학에 유리한지 모르겠어요. 결국 불안해서 학원에 물어보고 결정하는 친구들이 많아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교학점제를 이해하거나 제대로 설명해줄 교사도 드물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가장 큰 문제는 제도의 핵심 장치인 ‘최소 성취 수준 보장제(최성보)’의 파행 운영이다. 교과별 학업 성취도가 40% 미만인 학생은 학점당 5시간의 예방 및 보충 지도를 받아야 하고, 2/3 이상 출석이 이수 기준이다. 원칙대로라면 미이수 처리된 학생은 졸업이 불가하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한 교사는 “최성보를 원칙대로 운영할 학교는 거의 없어요. 최소 성취 수준 미달 학생이 없도록 지필평가 난이도를 낮추고, 수행평가 비율을 높이는 게 기본이죠. 심지어 수행평가에서 기본 점수를 주는 방안까지 나오고 있어요”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지난 3월 모의평가에서 한국사 영역 20점 미만 학생이 수십 명에 달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국적 판별 시험’이라 조롱받을 만큼 쉬운 시험에서도 이런 결과가 나온 현실은 교육 현장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학교마다 공문으로 내려온 최성보 계획서 제출 요구와 ‘점수 퍼주기’ 의심 시 감사 경고는 교사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다. 한 교사는 “시험을 쉽게 내도 안 되고, 40점 미만 학생이 있어도 안 된다는 건 ‘동그란 네모’를 그리라는 주문과 다를 바 없어요. 결국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죠”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비대면 원격 수업도 출석으로 인정되다 보니, 출석 기준인 2/3을 채우는 건 어렵지 않다. 제도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배려가 오히려 편법을 부추기는 꼴이다.
대학 입시 전형에서도 혼선은 계속된다. 절대평가인 성취 평가제와 기존 상대평가를 섞은 상황에서 표준점수 산출도, 등급도 무의미해졌다. 대학들은 입시 기준을 정하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다. 한 고1 학생은 “우리는 ‘마루타’ 같아요. 대입이라는 결승선은 보이는데 주로가 없으니 불안해서 사교육에 의지할 수밖에 없죠”라며 자조 섞인 말을 내뱉었다. 실제로 고교학점제 대비 전문 학원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는 소식은 제도의 실패를 예감하게 한다.
학교 현장에서 고교학점제는 내란 사태에 버금가는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내란과 경제 위기로 나라가 흔들리는 와중에 교육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지만, 이 혼란은 학생과 교사, 학부모 모두에게 큰 부담이다. 고교학점제의 취지는 좋으나, 현실과 상충하는 제도적 한계는 여전히 크다. 한 교사는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여전히 대학 이름으로 답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고교학점제가 과연 교육적 제도인지,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태풍 전야의 고등학교 현장, 이 혼란이 어떻게 정리될지,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 하루빨리 답을 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