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19. 03:44ㆍ카테고리 없음
하루 15시간 노동에 월급 270만원... 쪽지 한 장 남기고 사라진 네팔 노동자의 선택
새벽 공기를 가르는 소 울음소리가 들린다. 경기 북부 한 젖소농장,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3시 30분. 네팔인 노동자 B씨(40대)는 이미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젖소들에게 다가간다. 120여 마리의 젖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착유, 사료 주기, 우사 청소까지 모든 일을 그 혼자 해내야 한다.
"아침 3시 반부터 저녁 6시 반까지, 매일 똑같은 일상이었어요. 휴일은 꿈도 못 꿨죠."
B씨를 만난 건 그가 농장을 떠난 지 일주일 후였다. 서울 외곽의 한 건설현장 인근 컨테이너에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처음엔 괜찮을 줄 알았어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B씨가 한국에 온 건 2년 전이다. 네팔 카트만두 근교의 작은 마을에 아내와 초등학생 자녀 둘을 두고 왔다.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 지금은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다. 그는 고국에서 농사일을 했기에 젖소 농장 일을 맡게 됐다.
"처음에는 월급이 적어도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일이 너무 많았어요. 혼자서 120마리를 돌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B씨가 농장 사무실 책상 위에 남긴 쪽지는 단 한 줄이었다. "일 너무 많은데, 돈 조금이라 다른 데로 갑니다." 한국어로 꾹꾹 눌러쓴 이 문장에는 2년간의 고통이 응축되어 있었다.
농장주 김모씨(58)는 B씨가 떠난 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주 이직하는 건 농촌의 현실입니다. 우리도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어요. 더 많은 임금을 주고 싶어도 농장 운영이 어려워요."
하지만 이 농장에서 일했던 또 다른 외국인 노동자 C씨(30대)는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사장님은 마치 왕처럼 행동했어요. 휴일 달라고 하면 '한국에 돈 벌러 왔지, 놀러 왔냐'고 했죠. B형은 정말 성실했어요.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고, 항상 묵묵히 일했어요."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농축산업 분야 외국인 노동자의 이탈률은 제조업보다 2배 이상 높다. 열악한 근로환경과 저임금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지역 이주노동자지원센터 활동가는 "농축산업 현장의 노동 강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루 15시간 노동에 휴일 없이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최저임금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고요"라고 말했다.
B씨는 이제 불법체류자가 됐다. E-9 비자로 입국한 그는 사업장을 이탈함으로써 합법적 체류 자격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불법체류자가 되는 게 두렵지만, 노예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하루 10시간 일하고 12만원 받아요. 일요일엔 쉴 수 있고요."
그의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울린다. 인력이 필요한 현장에서 오는 연락이다. 한국어를 할 줄 알고 성실한 그는 불법체류자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현장에서 찾는 인력이다.
"고향에 돈을 더 많이 보낼 수 있어요. 아이들 학비도 보내고, 언젠가는 작은 집도 마련하고 싶어요."
B씨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지만,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더 밝아 보였다. 그는 자유를 선택했다. 비록 그 자유가 불안정하고 위험을 동반한 것일지라도.
저녁 어스름이 내리자 B씨는 다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야간 건설현장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결연함이 느껴졌다. 그가 남긴 쪽지 한 장은 한국 농축산업이 직면한 구조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