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회피의 언어, 권력의 간교한 수사학

2025. 4. 19. 06:35카테고리 없음

"~했을 뿐"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우리 사회의 민낯



"저는 그저 제안했을 뿐입니다." "단지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에요." "말했을 뿐, 지시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말들이 익숙하게 들리는가? 최근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이들의 입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했을 뿐'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언어적 습관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권력의 수사학이다.

지난 주 뉴스를 보다가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전 해병대 사단장 임성근은 "여단장에게 수색 계속 의견을 제시했을 뿐 명령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발표했을 뿐 지명한 건 아니다"라고 했다. 파면된 윤석열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는 평화적인 대국민 메시지였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세 문장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했을 뿐'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자신의 행위가 가진 무게와 책임을 가볍게 만들려는 시도다. 이는 단순한 언어적 트릭이 아니라 권력의 본질을 드러내는 징후다.

권력자들이 이런 표현을 즐겨 쓰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은 권력을 행사할 때는 당당하게 자신의 권한을 내세우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을 때는 갑자기 자신의 행위를 최소화하고 축소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학자 전우용이 말한 '간교함과 파렴치'의 실체다.

화요일 아침,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난 법학과 교수는 이런 현상을 '책임 회피의 언어학'이라고 불렀다. "권력 언어에는 패턴이 있어요. 성공과 업적을 이야기할 때는 '내가', '우리가'라는 주어를 강조하지만, 실패와 책임을 이야기할 때는 주어가 사라지거나 행위의 무게를 축소하는 표현을 씁니다."

이런 언어적 패턴은 단순히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권력 구조의 산물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말이 가진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한마디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한 책임만큼은 회피하려 한다.

"여단장에게 수색 계속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군대라는 조직에서 상관의 '의견 제시'가 단순한 제안에 그칠 수 있을까? 계급 사회에서 상관의 '의견'은 사실상 '명령'과 다름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명령한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부하에게 전가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발표했을 뿐 지명한 건 아니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국무총리라는 위치에서 '발표'한 것이 단순한 정보 전달에 불과했을까? 그것은 분명 공식적인 국가 행위였고, 그에 따른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하지만 "발표했을 뿐"이라는 표현으로 그 행위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려 한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비상계엄 선포는 평화적인 대국민 메시지였을 뿐이다"라는 주장이다. 비상계엄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메시지'로 축소하는 이 표현은 권력의 오만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헌정 질서를 뒤흔드는 행위를 마치 일상적인 소통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다.

목요일 저녁, TV에서 한 정치인의 인터뷰를 보았다. 그는 과거의 논란이 된 발언에 대해 "단지 개인적인 생각을 말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공인으로서 공개적인 자리에서 한 발언을 '개인적인 생각'으로 축소하는 이 패턴이 너무나 익숙했다. 권력자들의 언어는 마치 복사기로 찍어낸 듯 닮아 있다.

전우용 역사학자의 말처럼, 이런 간교함과 파렴치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든 진보든, 권력을 가진 이들이 보이는 공통된 '습성'이다. 그것은 양심은 없고 탐욕만 있는 비루한 것들의 특성이다. 권력을 쥐었을 때 나타나는 이런 습성은 정치적 성향을 초월한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언어가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는 현상이다. 기업 임원들, 학교 관리자들, 심지어 가정에서도 이런 책임 회피의 언어가 일상화되고 있다. "그냥 제안했을 뿐인데 왜 그렇게 받아들여?"라는 말은 이제 흔한 변명이 되었다.

이런 언어가 표준이 되는 사회에서는 책임 있는 시민의식이 자라기 어렵다. 권력자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난 아이들은 어떤 시민으로 성장할까? 그들 역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했을 뿐"이라는 말로 회피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건강한 사회는 권력과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다. 권력을 행사할 때의 당당함만큼이나,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때도 당당해야 한다. "~했을 뿐"이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했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진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권력자들의 언어에 더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그들이 어떤 말을 사용하는지, 어떤 표현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축소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권력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창이기 때문이다.

"~했을 뿐"이라는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사회, 권력과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권력의 언어에 더 비판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민주시민의 기본 소양이자, 건강한 사회를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