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24. 11:25ㆍ카테고리 없음
"이재명 대표의 왕놀이를 위한 국정 인질극" - 김용태 의원의 이 발언에서 묻어나는 뻔뻔함과 위선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과연 누가 진정한 '왕놀이'를 하고 있는지, 차근차근 따져보자.
먼저 '왕놀이'라는 표현부터 살펴보자. 계엄 검토까지 했던 정권을 향한 견제를 '왕놀이'라 폄하하다니. 이는 마치 절대군주에 대한 신하들의 간언을 '불충'으로 매도하던 조선 후기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오히려 국회의 견제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태도야말로 진정한 '왕놀이'의 전형이 아닌가.
'국정 인질극'이라는 표현은 더욱 가관이다. 177석의 다수당이 행사하는 정당한 헌법적 권한을 '인질극'으로 매도하는 순간, 그들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마저 부정하고 있다. 국민의 압도적 지지로 획득한 의석을 통한 견제가 '인질극'이라면, 과연 무엇이 정당한 견제인가? 침묵하고 복종하는 것인가?
특히 아이러니한 것은, '왕놀이'를 비판하는 이들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왕놀이'에 가깝다는 점이다. 행정부의 결정에 대한 어떠한 이의제기도 용납하지 않으려 하고, 국회의 견제 기능을 무력화하려 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국정 농단'으로 매도하는 행태. 이것이야말로 전제군주적 발상 아닌가?
김용태 의원은 '이재명 대표'를 특정하며 개인화를 시도했지만, 이는 오히려 자신들의 협소한 정치적 시야를 드러낼 뿐이다. 177석 다수당의 의사결정을 한 개인의 의지로 환원하는 것은,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진정한 '왕놀이'는 견제받기를 거부하는 권력에서 시작된다. 비판을 용납하지 않고, 저항을 탄압하며, 자신들의 결정만이 옳다고 믿는 오만함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김용태 의원의 발언은 스스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민주주의는 결코 '왕놀이'와 양립할 수 없다. 견제와 균형, 비판과 토론이 있어야 민주주의는 살아숨쉰다. '왕놀이'를 비판하는 자들이 실은 가장 강력한 '왕놀이'를 하고 있다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왕놀이' 프레임이 만들어내는 위험한 정치적 담론이다. 정당한 견제 행위를 '국정 방해'로 몰아가고, 헌법적 권한의 행사를 '정치 보복'으로 왜곡하며, 민주적 저항을 '국가 전복 시도'로 매도하는 행태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한다.
"이재명 대표의 개인 야욕"이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마치 촛불 혁명을 특정 세력의 선동으로 폄하하려 했던 과거 수구 세력의 레토릭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177석이라는 압도적 다수당의 의사결정을,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국민의 목소리를 한 개인의 야심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다.
김용태 의원과 같은 이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누가 진정한 '인질극'의 주범인가? 국민의 뜻을 무시한 채 독단적 국정 운영을 강행하는 세력인가, 아니면 이를 견제하려는 세력인가? 누가 진정 국민을 '인질'로 잡고 있는가?
'왕놀이'라는 표현은 결국 자신들의 본질을 드러내는 자백이다. 민주적 견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며, 저항을 탄압하려는 권위주의적 본색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들이 말하는 '국정 안정'이란 결국 '권력자의 안위'를 의미할 뿐이다.
민주주의는 결코 순탄하지 않다. 견제와 저항, 비판과 투쟁이 있기에 민주주의는 살아있는 것이다. '왕놀이'를 비판하는 자들이 진정한 '왕놀이'의 주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가 김용태 의원의 발언을 그저 정치적 수사로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진정한 '왕놀이'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그리고 지금, 그 위협은 '왕놀이'를 비판하는 자들로부터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