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24. 11:26ㆍ카테고리 없음
-극단은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격리와 치료의 문제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내에서 우리는 공존의 연습을 한다. 사사건건 의견이 부딪히고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갈등이 폭력으로 변하고 생명을 위협할 정도에 이른다면, 공존의 시도는 끝이 난다. 배우자가 칼을 휘두르며 위협한다면, 더 이상 그 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생존과 안전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든 사회든 마찬가지다. 우리가 속한 사회는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며 공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서로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관계에서는 공존의 논리는 무의미해진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부정하며 폭력을 미화하고 그것을 정당화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한 공간에서 계속 살 수는 없다.
◇광기의 정상화가 만든 비극
한국전쟁의 참혹했던 시기를 떠올려 보자. 그 시절, 미군의 병사 상당수가 전쟁의 공포와 충격으로 정신질환 판정을 받고 후송되었지만, 한국군은 단 한 명도 그런 진단을 받지 않았다. 판단을 내릴 정신과 의사조차 없었기 때문이고, 나아가 전쟁이라는 광기 속에서 비정상이 곧 ‘정상’이 되어버린 탓이었다.
‘광기’는 전쟁 속에서, 그리고 그 이후의 사회에서조차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았다. 양민학살과 포로학대는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고, 심지어 그것이 표준처럼 받아들여졌다. 그 시기의 비극은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타인의 생명과 안전을 배척하고 배제하는 ‘정당한 폭력’을 외치는 광기가 퍼져 있다.
이에 대해 미셸 푸코는, 광기를 격리하는 것이 근대적 사회의 시작이라 말했다. 이 의미를 다시 곱씹어 볼 때다. 광기를 격리하지 않고서는 건강한 사회를 기대할 수 없다. 되려 광기가 사회의 일부처럼 퍼지는 순간, 공동체는 붕괴의 길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법이 부재하는 곳에서 필요한 문화의 역할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나치 추종자나 반인륜적 범죄자를 법으로 격리시킨다. 이것은 단지 처벌의 의미를 넘어, 광기를 사회에서 분리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법은 이를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다. 공공연한 내란 선동조차 처벌받지 않는 상황에서, 법은 광기의 확산을 막는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와 문화가 나서야 한다.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사회적 합의로 광기를 격리하고 고립시키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이를 통해 그들이 공동체의 다수가 아니라, 격리된 소수임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차별의 논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생명과 생존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극단을 공존의 이름으로 포용할 수 없다
윤석열이 복귀해 ‘종북 반국가 세력을 싹 다 쓸어버려야 한다’는 극단적 발언을 외치는 극우들이 있다. 기본적인 민주적 가치와 법치주의를 무시한 채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들과 우리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도 이들을 그대로 두거나 무시한다면 그들은 마치 ‘정상’의 일부로 자리 잡을 것이다.
공동체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광기를 광기로 지목하는 것, 이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저항이 아니다. 목적은 격리를 통한 ‘치료’다. 고립된 광기 속에서, 그들 스스로 자신이 속한 극단적 상태를 자각하고 치유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
◇민주공화국의 지속 가능성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건강한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려면, 극단적 광기를 고립시킬 용기가 필요하다.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공존을 위협하는 요소를 처리하는 정당한 공동체의 자기방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히 이념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 생존과 안전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극단은 공존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을 격리하고 치료를 도모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