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4. 19:26ㆍ카테고리 없음
성폭력 재판에서 피해자의 옷차림이 여전히 '증거'가 되는 현실
법정에서 피해자의 속옷이 증거로 제시되는 순간, 재판의 초점은 이미 가해자의 행위에서 피해자의 선택으로 옮겨진다. 2018년 아일랜드의 '레이스 팬티 사건'은 우리 사회가 성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17세 소녀가 입었던 레이스 팬티 한 장이 그녀의 진술보다, 그녀의 고통보다, 그녀의 거부 의사보다 더 큰 목소리를 가졌던 순간이었다.
"속옷은 단지 속옷일 뿐이다." 이 당연한 문장이 왜 이토록 혁명적으로 들리는 걸까. 여성의 옷차림이 성폭력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수없이 말해져 왔다. 그럼에도 법정에서, 일상에서, 미디어에서 여전히 피해자의 옷차림은 '정황 증거'로 활용된다.
성폭력 상담소에서 10년간 일해 온 김지현 상담사는 "피해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가 '내가 그때 그런 옷을 입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자책"이라고 말한다. "가해자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피해자가 떠안는 이 구조는 너무나 견고해서, 피해자들 스스로도 내면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일랜드 사건 이후 여성들이 자신의 속옷을 들고 거리로 나섰던 시위는 단순한 분노 표출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옷차림이 내 동의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레이스든, 면이든, 실크든, 어떤 소재의 속옷도 성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외침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사건을 통해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의 내적 갈등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가 가르쳐준 '신호'를 읽었다고 생각했다. 여성의 웃음, 짧은 치마, 레이스 팬티가 모두 '그녀가 원한다'는 신호라고 믿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남성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왔는지 보여준다. '여성의 몸은 해석의 대상'이라는 메시지를.
성범죄 전문 변호사 박민우는 "법정에서 피해자의 옷차림이 언급될 때마다, 우리는 성폭력의 본질에서 멀어진다"고 지적한다. "성폭력은 동의 없는 성적 행위다. 옷차림은 동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단순한 사실이 법정에서조차 흐려지는 현실이 문제"라고 말한다.
레이스 팬티 사건은 단지 하나의 재판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는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와 해석의 권리를 여전히 사회가, 법정이, 타인이 가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비친다.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가질 때까지, 이런 재판은 계속될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종종 두 번 상처받는다. 한 번은 가해자에 의해, 또 한 번은 사회에 의해. "당신이 무엇을 입고 있었나요?"라는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질문이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던져질 때, 그것은 제도적 폭력이 된다.
여성학자 이진희는 "옷차림에 대한 집착은 성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으려는 오래된 관행"이라며 "이는 가해자의 책임을 희석시키고, 성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축소한다"고 분석한다.
아일랜드의 레이스 팬티 사건 이후, 많은 국가에서 성폭력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과거 성 이력이나 옷차림을 증거로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는 법안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는 작은 진전이지만, 법적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인식, 언어, 문화가 함께 변해야 한다.
매일 아침 옷장 앞에 서서 오늘 입을 옷을 고르는 여성들이 "이 옷을 입으면 내가 위험해질까?"라는 질문에서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이스 팬티가 동의를 의미하지 않는 세상, 여성의 몸이 해석의 대상이 아닌 존중의 대상이 되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법정에서, 거리에서, 일상의 대화에서 울려 퍼져야 한다. "이건 동의가 아니다." 아일랜드 여성들이 들었던 피켓의 메시지처럼 단순하고도 강력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