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29. 01:58ㆍ카테고리 없음
산불과 정치 혼란 속에서 다시 생각하는 가치 있는 노동의 의미
나라가 흔들린다. 의사 파업으로 시작된 혼란은 비상계엄 논란과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고, 이제는 경상도 일대를 집어삼키는 대형 산불까지 더해졌다. 사망자는 20명을 넘어섰고, 진화 헬기마저 추락해 조종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몇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돌아가던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 와중에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은 지지부진하고, 야당 대표의 재판 결과만 먼저 나와 정치권은 또다시 말싸움에 돌입했다. 뉴스는 온통 법리 논쟁과 정치적 해석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산불로 집과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그리고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든 소방관들에게 이런 말장난은 한낱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스터즈 터클의 책 『일』에 등장하는 한 소방관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빌어먹을 세상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이 나라도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하지만 소방수는 생산적인 일을 한다구요. 불을 끄니까요."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진짜 일'이라고 표현했다. 불을 끄고, 아이를 구하고, 인공호흡을 하는 것—이것이야말로 종이에 적힌 숫자나 들여다보는 것과는 다른, 실체가 있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위기는 어쩌면 '진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데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은 말싸움에 몰두하고, 관료들은 책임 회피에 급급하며, 전문가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을 늘어놓는다. 그 사이 산불은 계속 번지고, 사람들은 목숨을 잃는다.
산불 현장에서 소방관들은 자신의 안전을 뒤로하고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성향도, 이념적 논쟁도 중요하지 않다. 불이 났으니 끄러 가는 것, 누군가 위험에 처했으니 구하러 가는 것—그것이 그들의 '진짜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의 결과는 명확하다. 불이 꺼지거나, 사람이 구조되거나, 혹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잃거나.
터클이 인터뷰한 소방관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불을 껐어. 누군가를 살렸다구.' 그건 이 세상에서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했다는 말이죠." 이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문장에는 노동의 본질적 가치가 담겨 있다. 그것은 자신의 행동이 세상에 가시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확신, 그리고 그 변화가 누군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다.
물론 모든 소방관이 완벽한 인격자는 아니다. 터클이 인터뷰한 소방관 역시 남성성에 대한 유치한 과시와 인종적 편견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진짜 일'의 가치는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숫자가 아닌, 실체가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노동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진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방관뿐만 아니라 간호사, 환경미화원, 배달원, 공장 노동자, 농부 등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며 세상을 움직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진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사회적으로 저평가되고, 그들의 목소리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무시된다.
반면 '진짜 일'과 거리가 먼 직업들—정치인, 금융인, 컨설턴트, 관료 등—은 더 많은 권력과 보상을 누린다. 이들은 종종 추상적인 개념과 숫자를 다루며, 그들의 결정이 실제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간접적이고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은 어쩌면 이런 불균형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진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진짜 일'을 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세상을 움직이려 하니,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는 것이다.
대통령 탄핵이든, 야당 대표의 재판이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정치적 논쟁이 결국은 '진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산불이 모두 진화되고, 정치적 혼란이 어떤 식으로든 정리된 후에도 우리 사회는 계속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누가 더 그럴듯한 말을 했는지가 아니라, 누가 '진짜 일'을 통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었는지일 것이다.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누군가를 구한 소방관, 밤새 환자를 돌본 간호사, 폭우 속에서도 쓰레기를 수거한 환경미화원—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정한 영웅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사회가 다시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이런 '진짜 일'을 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