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29. 03:13ㆍ카테고리 없음
산불 피해 복구와 해외 순방 비용 사이에서 드러난 예산 운용의 민낯
국가 예비비는 말 그대로 '비상시'를 대비한 자금이다. 예측할 수 없는 재난이나 긴급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미리 확보해두는 국가의 비상금통이다. 그런데 최근 이 예비비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 과연 이 돈이 진정한 '비상'을 위해 쓰이고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한쪽에서는 산불 피해 복구를 위한 예산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대통령 해외 순방에 523억원의 예비비가 사용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 황당한 것은 갑자기 취소된 순방으로 5억 8500만원의 위약금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과연 '비상'의 정의에 부합하는 지출인가?
예비비 규모를 둘러싼 여야의 공방도 흥미롭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예비비를 절반으로 삭감했다고 비판한다. 반면 이재명 대표는 "현재 산불 대책에 사용할 국가 예비비는 총 4조 8700억원이 이미 있다"며 정부의 주장을 반박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이런 공방 자체가 예비비 운용의 투명성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준다.
예비비의 본질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다. 산불, 홍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나 갑작스러운 국가적 위기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해외 순방은 과연 예측 불가능한 상황인가? 이는 충분히 계획하고 정규 예산에 반영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예비비에서 523억원이라는 거액을 사용했다는 것은 예비비가 '비상금'이 아닌 '쌈짓돈'으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예비비 사용에 대한 사후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예비비는 국회의 사전 심의 없이 정부가 재량으로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사후에 국회에 보고하는 절차가 있지만, 이미 지출된 돈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이런 구조가 예비비를 '쌈짓돈'처럼 사용하게 만드는 유혹을 제공한다.
정일영 의원의 지적처럼, 예비비 삭감은 "잘못된 나라 살림을 정상화하고 민생 회복을 위한 예산에 집중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무조건 많은 예비비를 확보하는 것보다, 그 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한 투명성과 책임성을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현재 대한민국은 경상도 일대의 대규모 산불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것이야말로 예비비를 사용해야 할 진정한 '비상 상황'이다. 그런데 정작 이런 상황에서 예산이 부족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한편으로는 해외 순방에 수백억원의 예비비가 사용됐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는 국가 재정 운용의 우선순위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예비비는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소중한 자금이다. 이 돈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 사용되어야 한다. 해외 순방이나 의전비, 홍보비 등으로 예비비를 사용하는 것은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다.
앞으로 예비비 사용에 대한 더욱 엄격한 기준과 투명한 공개가 필요하다. 어떤 상황이 진정한 '비상'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함께, 예비비 사용 내역을 실시간으로 국민에게 공개하는 시스템도 고려해볼 만하다. 또한 불필요하게 사용된 예비비에 대해서는 책임자에게 분명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국가 예비비는 정부의 쌈짓돈이 아니라 국민의 안전을 위한 최후의 보루다. 이 기본적인 원칙이 지켜질 때, 우리는 진정한 비상 상황에서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산불 피해 복구와 해외 순방 비용 사이에서 드러난 예산 운용의 민낯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국가 재정의 우선순위를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할 때다.